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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2012-12-29 22:07:08 | 조회 : 1741
제        목   서강 김계금(金係錦) 어른
김계금(金係錦)에 대하여
김계금은 1405년(태종 5)에 태어나 1493(성종 24)에 사망하였다. 호는 서강(西岡),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1454년(단종 2)에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거쳐, 의성현령(義城縣令)을 지냈다. 단종이 폐위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 김해로 돌아와 생림리에 서강정(西岡亭)을 짓고 도의를 닦았다. 세상에서는 그를 육일거사(六一居士)라 불렀다. 부친은 김효분(金孝芬)이다.

1445년(세종 27)에 생원이 되고, 1454년(단종 2)에 증광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지평(持平)‧의성현령을 지냈다.

1455년(세조 1) 권지학유(權知學諭)가 되었으나, 이듬해 사육신사건으로 많은 인물들이 화를 당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다.
(충신 생七신의 한분이신 서강 김계금 공) 육일거사

1463년 겸지평으로 호패(號牌)의 규검(糾檢)을 위해 지방을 순행하도록 발탁되었다. 집현전권지학유를 지내 문장과 행의로 이름이 있었으며, 죽은 뒤 사림에서 사당을 건립하여 제향하였다.

저서로는 《장릉사보(莊陵史補)》‧《강의제현록(講義諸賢錄)》‧《무오유현록(戊午遺賢錄)》‧《서강일고》 등이 있다.


서강일고 (西岡逸稿)

(일고책판  서강 김계금  도유형문화재 제352호
진영읍 신용리 245-1
문집명  서강일고 (西岡逸稿)(15-16c)
  
간략서지  古 3428-844西岡 金係錦의 문집. 2권 1책.  
  
간략해제  1915년 후손 奎東이 등이 편집해서 간행했다. 권두에 李彙寧의 서문과 권말에 盧相稷·奎東의 발문이 있다. 金係錦의 저작으로는 권1에 시3수가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저자와 관련된 사적이나 부록들이다. 규장각에 <古 3428-844>와 <古 919.5-G418s> 두 종류의 책이 소장되어 있으나 동일한 판본이다.  

편저자  김계금 (金係錦)
저자개요  1405-1493 (태조5-성종24)一名: 係綿‚ 號: 六一·西岡‚ 本貫: 金海‚ 父: 燉
  
저자내용  1445년(세종 27)에 생원이 되고‚ 1454년(단종 2)에 증광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持平·의성현령을 지냈다. 1455년(세조 1) 權知學諭가 되었으나‚ 이듬해 死六臣事件으로 많은 인물들이 화를 당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다. 1463년 겸지평으로 號牌의 糾檢을 위해 지방을 순행하도록 발탁되었다. 집현전권지학유를 지내 문장과 行誼로 이름이 있었으며‚ 죽은 뒤 사림이 薇陽서원을 건립하여 제향하였다.
    

내용제목  西岡逸稿 내용개요  청구기호  古 3428-844

遺詩 吊陵詩‚ 戒子規歌-端廟在寧越時歌子規以自傷故先生感而作此詩‚ 望海  


實蹟 (1) 1892. 저자가 판서 金燉의 아들로 단종이 왕위에서 밀려나자 그날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 김해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면서 오로지 단종에 대한 의리를 지키며 살았다는 것과 사람들이 그를 六臣 외에 또 한 사람이라하여 “六一居士”라고 불렀다는 것‚ 1832년(순조 32)에 그를 위하여 薇陽書院을 세우고 제향했다는 내용 등이 적혀 있다.


墓碑 (2) 性齋 許傳(1797-1886)이 글을 짓고 八溪 鄭顯奭이 글을 쓰고 河陽 許栻이 篆刻했다. 단종 폐위 이후 金係錦이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켜 당대 사람들이 그를 生六臣에 한 명을 더 첨가시킨다는 의미에서 “六一居士”로 불리게 되었던 일‚ 金係錦의 부친인 金墩이 集賢殿 應敎 提學으로 근무하면서 훗날 사육신으로 유명한 朴彭年·河緯地·成三問·李愷·柳誠源 등 5인과 절친하게 지냈던 일‚ 死六臣 사건 이후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물러나서 은거한다”라는 의미에서 “退隱”으로 짓고 정자에 “西岡”으로 편액을 걸어 놓고 耕釣로 소일하고 학자들과 도의를 연마했던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薇陽書院奉安祝文 (4) 鶴棲 柳台佐(1763-1837)가 김계금의 단종에 대한 절의를 숭상하는 글.  

薇陽書院常享祝文 (4) 유태좌가 지었고 내용은 위와 같음.  
薇陽祠記 (5) 1865. 許傳이 金係錦의 절의를 ≪論語≫에 나오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경우에 연결시키고 있다. 그리고 사육신은 부당한 일을 바로잡으려고 노심초사하다 목숨을 바친 사람으로 평가하고‚ 생육신은 자기 몸을 더럽히지 않고 군신의 의리를 지킨 사람으로 평가한다. 金係錦도 “육일거사”로 불리었던 점을 들면서 세 경우는 그들의 형적이 다르지만 그들의 마음은 동일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蕨峴齋記 (5) 凝川 朴致馥이 薇蕨(고비와 고사리)과 金係錦의 관련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김계금을 장사지내고 난 뒤 그 부근에는 원래 고사리와 고비가 없었는데 다북하게 자라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후대 사람들이 그를 추모하는 사당과 서원을 건립할 때 명칭을 모두 薇蕨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박치복은 김계금을 해동의 백이(先生海東之伯夷)라고 평가한다.  


蕨峴齋上樑文 (6) 1870. 東阿 李濟永(1799-1871)이 金係錦의 절의·가계 등을 적은 글.  

蕨峴齋重修上樑文 (8) 1874. 후손 奎現이 金係錦의 사적과 덕행 등을 적은 글.  

莊陵史補靖義諸臣列傳 (10) 본문은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킨 인물들의 사적을 기록한 글로 ≪弘齋全書≫에 <莊陵史補靖義諸臣列傳>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곳에 해당인물의 자·호·본관·관직경력·사적 및 인물에 대한 평가 등이 실려 있다. ≪西岡逸稿≫를 편집하면서 金係錦의 사적이 포함되어 있어 전재한 듯하다. 그곳에 열거된 인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金時習(1435-1493)·南孝溫(1454-1492) ·李孟專·趙旅(1420-1489)·元昊·成聃壽(?-1456)·鄭保·權節·曺尙治·權山海(?-1456)·柳自湄·具仁(人)文(1409-1462)·權策·奇虔(?-1460)·宋侃·李秀亨·徐翰廷·鄭之産·尹譓·李蓄·洪演·金係錦·李堅基(1384-1455)·金自仁·金漢啓·沈遜·金佑生(1372-1457)·申末舟(1439-?)·文天鳳·閔審言·沈璿·李岸·安桑鷄·柳潤·孫汶·奴禿同과 尹生·궁비 蟲介  

甲戌文科榜目 (25) 김계금이 1454년(단종 2)에 증광문과에 정과에 급제할 때 합격자들의 명단을 ≪國朝榜目≫에서 전재한 글이다. 을과의 3인으로 鄭孝常(1432-1481)·李淑瑊·柳季藩 등이 있고‚ 병과의 7인으로 李孝孫·李繼昌·崔應賢(1428-1507)·鄭至韶·柳阡·金潤宗·金淑 등이 있고‚ 정과의 23인으로 申卜倫·成壽嶙·金永堅·權至·崔晴·白思粹·金暖·金積福·南椅·曺好智·朴孟智·文紹祖·李元孝·曺克治·李文饒·孫次緜·申末舟·林秀卿·金係錦·郭自容·高台翼·仇自平·李三山 등이 있다.  

摭錄 (27) 이 글은 ≪奎章閣補錄≫·≪嶺南人物攷≫·≪金州志≫·濯纓 金馹孫(1464-1498) 의<會老堂記> 등에서 김계금의 관련 사적을 전재한 글로 모두 5부분으로 되어 있다. 모두 金係錦의 단종에 대한 절의와 묘지에 고사리와 고비가 자란 일 등을 기록하고 있다.  
  
請建書院狀 (29) 1803. 본문은 宋灝增·許耆·盧思程·曺繼文 등이 당시의 巡察使에 올린 것이다. 선비(士)가 군주에 대해 충성과 의리를 품고서 자기 몸을 희생하며 仁을 성취하거나(殺身成仁) 자신의 형적을 감추어 절의를 온전히 하는(遯跡全節) 경우가 있는데‚ 양자의 처신은 다르지만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金係錦의 사적이 <莊陵史補靖義諸臣列傳>에 열거될 정도로 그의 행적이 뚜렷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金係錦을 추모하는 서원의 건립을 요구하고 있다.  

嶺南士林通文 (30) 1768. 金係錦의 사적이 여러 문헌에 실려 있음을 들어‚ 李頤發이 김계금을 추모하는 서원건립 운동을 추진한다는 통문이다.  
詩 過吾西山有感(金光稷)‚ 又(李元普)‚ 又(許晸)‚ 又(盧佖淵)‚ 讀西岡金先生實記有感(金光稷)‚ 又(李元普)‚ 又(許偉)‚ 蕨峴金光稷)‚ 又(李元普)‚ 又(金縣魯)‚ 又(曺深)‚ 又(朴世喆)‚ 又(趙洽)‚ 又(金相民)‚ 又(申嶷)‚ 又(孫宇魯)‚ 又(柳汶龍)‚ 又(柳宜漢)‚ 又(李殷淳)‚ 又(盧以文)‚ 又(盧秉淵)‚ 又(李象億)‚ 又(河鎭廣)‚ 又(尹東野)‚ 又(金瀅培)‚ 塚上薇-出朴致馥大東續樂府 위 시는 김계금 사후 그의 행적을 추모하며 여러 사람들이 지은 것이다.  
西岡先生逸稿重刊跋 (跋1) 1915. 盧相稷이 김계금의 후손 규동의 부탁으로 문집 간행에 즈음하여 쓴 글. 김계금의 사적이 후대에 잘 알려지지 않는데 그 원인은 단종관련사적이 사대부나 사관들에게 “爲親諱”·“爲尊諱”·“爲國諱”의 경우로 간주되는 데에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정조 조에 <莊陵史補靖義諸臣列傳>을 지어 단종에 대해 절의를 지킨 인물을 현창하게 된 것을 매우 다행한 일로 평가하고 있다.  

跋 (跋2) 1915. 후손 奎東이 문집간행에 즈음하여 金係錦에 대한 추모의 감정을 적은 글. 당시는 김계금이 죽은 지 423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南州人들이 김계금의 마을을 지나며 이곳은 ‘김선생이 이름지은 서산이다(金先生之西山也)’라거나‚ ‘김선생 사후 고비와 고사리가 난 곳이다(金先生之薇蕨)’라거나‚ ‘김선생이 관직에 물러나 은거하던 곳이다(金先生之所肥遯也)’라며 그에 대한 추모의 정이 끊임없다는 점을 적고 있다. (신정근)
q8imcs.egloos.com/ - 진천 농다리(籠橋)


퇴래리[Twerae-ri,退來里 ]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에 있는 리(里)이다.
마을 대부분의 지형이 평탄한 지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서쪽에서 북동쪽 방향으로 하천이 흐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퇴래, 삼미, 새터 마을 등이 있다. 퇴래 마을은 단종 3년(1455)에 서강 김계금이 단종의 선위를 개탄하고 사육신이 순절하는 날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돌아와 은퇴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삼미 마을은 삼미산 아래 위치한다는 의미에서 이름 붙여지게 되었으며, 새터 마을은 새로 된 마을이라 하여 불리워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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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파명은 도총관공 휘경신파이므로 귀파 이외의 일가님이나 다른 성씨의 사람에겐 공식 파명을 사용 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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