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駕洛 金海金氏 都總管公派 後孫 一家 홈페이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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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駕洛 金海金氏 都總管公派 後孫 一家 홈페이지 입니다
    뿌리를 찾아서 > 가락김해김씨의 유래


  김해김씨의 유래

김해를 본관으로 하는 다른 金氏族과 구분하기 위하여 엄밀히 따지면 駕洛金氏라 稱하는 것이 타당한 듯 합니다.

관향의 유래(貫鄕의 由來)

2000년 정부 주관으로 실시된 인구주택총조사 통계결과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姓氏는 모두 286개(귀화인 제외)와 4,179本이라 보고하고 있으며. [조선씨족통보]에서는 이들 성씨들이 나름대로 傳統을 가지고 있으나 始祖가 뚜렷한 것은 약 100여 本에 지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金氏는 크게  金海를 根本으로 하는 駕洛國 首露大王 系統과 慶州를 根本으로 하는 新羅國 김알지 系統이 根幹을 이루고 있으며, 이중 金海를 根本으로 하는 金氏에는 다시 가야계 駕洛金氏와, 신라계 分派인 新羅 法興王 系統의 김해김씨(김녕김씨), 그리고 壬辰倭亂 당시 倭將 出身으로 朝鮮에 歸化한 김충선 系列의 김해김씨(우록김씨)가 있으나  우리 門中은 駕洛國 太祖王을 始祖로 하는 金海金氏입니다.

한때, 金寧金氏(경주김씨의 한 분파, 김녕은 김해의 옛 이름)도 朝鮮 高宗朝까지 金海金氏로 姓氏를 사용하였으나 그 後孫들이 駕洛國 金氏로 誤認하는 事例가 빈번하여 本名을 김녕으로 바꾸었는데, 지금도 가끔 김녕김씨중 일부는 김해김씨라 잘못 사용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전국 수십여개의 김씨가 대부분 경주김씨 계열에서 分貫된 것인데 反하여,  駕洛國 首露大王 계열의 김씨는 第一巨族임에도 불구하고 중앙종친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分貫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門中의 金海金氏는 駕洛國의 太祖王 諱 首露를 始祖로 하고 興舞王 諱 庾信(太祖 12世孫)을 中始祖로 하여 현재 148個로 分派되어 전국에 약 412여萬名이 있는 名門巨族입니다.

金氏라는 姓氏 由來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說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說의 하나가  기원 약 5천년전 中國 歷史時代以前의 少昊金天氏에서 由來(삼국사기 열전-김유신전 참조)되었다고 보는 學者도 있으나 三國遺事 駕洛國記에는 금빛 나는 알에서 제일 먼저 나왔다하여 이름을 首露로 하고, 姓氏를 金이라 定하였다고 記錄하고 있습니다.

金海가 지금은 작은 市街地에 불과하지만, 駕洛國의 都邑地로서 AD400년 고구려 호태왕의 침략이 있기전까지는 古代 加耶 6國의 중심이었습니다. AD532년(신라 법흥왕 19년)에 新羅에 倂合된 이후  金官小京 또는 金官郡으로 불리다가 文武王 20년에 金海로 改稱되었으나, 이후 高麗 충선왕 때에 비로소 金海府가 설치되는데. 이때부터 김해를 本貫으로 하였고, 駕洛國의 後孫이라 하여 駕洛金氏라고도 불리우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김해를 본관으로 하는 다른 金氏族과 구분하기 위하여 엄밀히 따지면 駕洛金氏라 稱하는 것이 타당한 듯 합니다.

三國遺事 駕洛國記의 記錄에 의하면
天地開闢이래 나라가 없었던 이 땅에, (기원전 57년에 경주 지방의 6촌장들이 박혁거세를 왕으로 하여 신라를 세우고, 기원전 37년에는 압록강변 계루부에 주몽이 고구려를 세웠으며, 기원전 18년에 위례성에서 온조왕이 마한을 통합한 백제를 세우더니, 이들 국가들이 세력확장을 위하여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비옥한 弁韓지역을 자주 침범하자) 이 지방의 부족장들인 9거간이 서기42년 3월에 龜旨峰에 모여 이른바 [龜旨歌]를 부르면서 지도자를 추대할 의식을 거행합니다.

 그때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에 쌓인 금합이 내려오더니 펼쳐보매 금빛 찬란한 6개의 알이 있었는데 이 속에서 6童子가 誕降하게 됩니다. 이들을 6가야의 지도자로 각각 추대하고 왕으로 삼으니 그중 첫째를 首露라 하니 駕洛金氏의 始祖가 됩니다.
즉위 후 나라 이름을 大駕洛이라 이름짓고, 즉위 7년에 太祖王은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許黃玉을 妃로 맞아들이니 이가 곧 許皇后가 됩니다. 슬하에 10남 2녀를 얻었는데, 곧 長子으로 하여금 김씨 성으로 대를 잇게 하고, 황후의 청에 따라서 2남과 3남으로 하여금 황후의 姓인 허씨를 잇게 하니 곧 金海許氏의 始祖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7남은 일찍부터 佛家에 귀의하니 지금의 하동 7불이 되었다고 전해옵니다, 高麗朝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자인, 이자겸등으로 대표되는 인천이씨(경원이씨)도 양천허씨에서 分派된 것이다 하여 모두 같은 血族으로 '駕洛中央宗親會'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락김씨, 양천허씨(김해허씨를 포함 대부분의 허씨는 곧 양천허씨에서 分貫된 같은 혈족입니다.), 그리고 인천이씨는 가락국 태조왕을 시조로 하는 같은 혈족에 속하므로 異姓同祖임에도 불구하고 婚姻을 不許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駕洛國은 太祖王께서 기원 42년에 建國하고, 532년까지 약 490년간 초기 6가야국의 맹주로써 연맹을 이끌어 오다가 第10代王 讓王朝에 신라 법흥왕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신라에 나라를 讓與함으로써 敗亡하게 됩니다.

신라에 복속된후 양왕(諱 仇衡)은 신라로부터 上等의 작위와 가락을 식읍으로 받게 되며, 11世 諱 武力께서는 신라의 장군으로서 이찬의 직위와 新州軍主를 역임하였고, 12世 諱 舒玄은 당대 신라 최고의 장군으로 大樑州 도독 대총관이었으며, 13세 諱 庾信은 삼국통일의 大業을 완수하시어  太大角干을 역임하고 死後에 興舞王의 칭호와 함께 신라왕과의 동등한 예우를 받게 됩니다. 신라 무열왕의 딸 지소부인과 혼인하였으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가락김씨의 世系가 번창을 하게 됩니다. 신라의 뿌리깊은 骨品制度가 옛 가락국 후손들의 생존에 위협적인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어, 生存을 위한 出世에 心血을 기울였다는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의 삶에 대하여 다른 시각으로 보면, 김춘추와 연분을 쌓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고, 신라 최고의 地位였던 태대각간에 오르는 화려했던 삶과 업적이 패망한 가락국 후손들의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일련의 생존권 투쟁의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후에 여러 門派로 分派되면서 가락종친회에 공식적으로 등록된 門派가 148개에 이르고 있고(미등록 문파를 합치면 대략 300여개 세파로 분파되어 있습니다.), 中始祖 興舞王의 直系宗派인 京派, 四君派, 三賢派가 主流를 이루고 있습니다.

가락김씨는 신라와 고려시대를 통하여 많은 文武名臣을 배출한 三韓甲族으로서, 高麗時代에만도 政丞給이 15명, 名臣·功臣이 10여명, 將軍 8명, 提學 11명등 숱하게 高級官僚와 人物들을 배출하여 그 위세를 떨쳤으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다소 부진을 면치 못하여  政丞이 겨우 1人에 거쳤습니다. 이것은, 김해김씨가 고려조에 충신이 유달리 많아서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조선왕조에서 수없이 도움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에 대한 절개를 지키고자 했던 연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한말을 거치면서 名門巨族에 걸맞게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어 국가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가락국왕의 칭호에 대하여 다른 설이 있으나, 여기서는 우리 보첩의 기록을 따르기로 합니다.)



시조대왕의 탄강과 건국

서기 40년경  변한의 땅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과 임금의 제도가 있을리 없었고 다만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 신천간(神天干), 등  9간이 백성들을 통솔하고 있을 뿐이었다. 당시의 백성들은 산과 들에 제각기 집단을 이루고 고기잡이와 농사일로서 식생활을 영위하고 있엇다. 그러나 점차 인구가 늘고 생활수단과 사회형태가 발전함에 따라 이들은  나라형태를 갖춘 통치조직이 절실하게 되었고 동시에  그 나라를  다스릴 유능한  임금을 추대하여야 할 역사적 전환점에 이르게 되엇다.

 서기 42년 첫세기의 중엽에 해당되는 이 해는 제일 먼저 고대왕국을 형성한 것으로 되어있는  신라의 유리왕 19년이며 백제의 다루왕 15년,고구려의 대무신왕 25년에 해당한다. 한반도에 차례로 생활집단이  고대왕국의 성립으로 엉기기 시작하던 무렵, 이 고장에도 그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그해 3월 계욕일 (계浴日. 음력 3월첫 뱀날(뱀날)에 액을 물리치기 위해 목욕하고 회음하는 풍습)에   9간과 백성들이 시냇가에 모여 나라를 다스릴 임금을 점지해 주십사 하고 신에게 정중한 의식을 거행하던 중 문득 가까운 구릉(丘陵)  구지봉(구旨峰)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었다. 이들이 구지봉에 올라 위를 쳐다보니 거기에는 오색찬란한 서광이 하늘높이 이어지고 서기가  천지에  뻗치며 자주 빛 밧줄에 분홍빛 보자기에  쌓인 금합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땅에 닿았다. 이에 9간들이 신기하고 놀라움에 가득차 그 금합을 조심스레 열어보니 그 안에는 해와 같이 둥근 황금알 여섯개가 들어 있었다. 더욱 신기하게 여긴  9간들은 서로 상의한 끝에 그 금합을 아도간의 집에 모시어 두기로 하고 그날은 모두 헤어졌다.  다음날 아침 그들은 다시 아도간의 집에 모여 그 금합을 열어보니  여섯개의  황금알은 여섯 동자로 화신해 있었다.

이 동자들은 모두가 용모가 준수하고 거룩하기만 했다. 그중에서도  제일 먼저 화생한 동자는 나날이 자라서 10여일 후에는 키가 9척이요,  얼굴은 용안이며 눈섭은 八자로 채색이 돌았고  눈은 중동의 아주  신이(神異)한 용모를 갖춘 현현장부의 기상이 넘쳐 흘러  9간들은 놀라고, 한편 기뼈서 엎디어 절을 올리며 이는 반듯이 우리들을 다스릴 군왕을 점지하여 주심이라 믿어 그달 보름날 즉위식을 갖고 임금으로 받들어 모시니 이 어른이 바로 가락국시조 김수로대왕(金首露大王)이시다.  성(姓)은 김(金)이라 하신 것은 금알에서 화생하였기 때문이며 어휘(御諱)를 수로라 하신 것은 여섯 황금알 중에서 제일 먼저 화생한 까닭이다.

 이에 시조 대왕께서는 국호(國호)를 대가락(大駕洛)이라 정하시고 그 수도를 김해(金海)로 삼으시었다. 그리고 나머지 다섯분들도 차례로 영토를 정하여 분봉 (分封)하였으니 아라가야 (阿羅伽倻 * 현 함안지방), 고령가야(古寧伽倻 * 현 함창지방). 대가야(大伽倻*현 고령지방), 성산가야 (星 山伽倻*현 성주지방),소가야(小伽倻*현 고성지방)  등5 가야였다.




허왕후 책봉

시조대왕께서 나라를 세우신지 7년째 되는 가락기원 7년(서기48년) 7월 27일 9간들이 대왕께 조알(朝謁)을 하고 아뢰기를 [대왕께서 강림하신 이래 아직 좋은 배필을 구하시지 못하였으니 신들의 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처녀를 간택하여 왕비로 삼으소서] 라고 하였다. 그러자 대왕은 조용히 입을 열다. [짐이 이곳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거니와 짐에게 짝을 지어 왕후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이 명할 것인즉 경들은 염려마시오]

그러한 어느날 대왕께서는 드디어 유천간에게 명하여 작은배와 말을 끌고 망산도에 가서 망을 보게 하시고 신귀간에게는 승점(승岾)으로 나아가 기다리도록 이르셨다. 때마침  가락국앞 서남쪽 바다 위에 붉은 빛깔의 돚을 달고 검붉은 빛의 깃발을 휘날리면서 북쪽으로 향해 오는 배 한척이 있었다. 망산도의 유천간이 곧 횃불로 신호를 올리자 그 배는 미끄러지듯 내달아와 지금의 경남 창원군 웅동면 용원리에 있는 부인당으로 들어와 정박하였다. 그 일행중에는  공주 (公主) 한 분과 시종 20인이 타고 있었다. 신귀간이 승점에서 이 광경을 보고 곧바로 대궐로 달려가 대왕께 아뢰었다.

대왕께서는 매우 흡족히 여기시고 급히 9간들을 보내어 대궐로 모셔오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9간들이 일행을 모시고 대궐로 들려하였으나 공주께서 엄숙히 말씀하시기를 [나와 그대들은 초면인데 어찌 경솔히 따라 가리오] 라고 하시었다.  유천간이 돌아와 공주의 말씀을 아뢰이니 대왕께서도 옳게 여기시고 유사를 데리고 대궐에서 서남쪽으로 6십리쯤되는 산기슭에 만전(만殿 * 장막으로 친 임금의 임시거처)을 치고 몸소 영접을 하시게 되었다.

공주께서는 별포나루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비단치마를 벗어 산신(山神)에게 예물로 바쳤다.  공주를 시종해 온 신하와 노비는 20여명이 되었고 또한 공주께서 가져온 화려한 비단과 의상 그리고 금은 주옥 패물 등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공주께서 점차 대왕이 계신 곳으로 가까이 닥아가자 대왕께서는 친히 나아가 정중히 맞아서 함께 장막궁전으로 드시었다.   시종해온 사람들은 뜰 아래에서  대왕을 뵙고 곧 물러갔다. 대왕께서는 유사에게 명하여 시종내외에게는 방하나씩 주게 하고  그이하 노비들에게는 한방에  5, 6명씩 들게하고는 난초로 만든 마실 것과 혜초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감도는 자리에서 자게하엿다.  그뿐아니라 비단과 보화까지 주고는 군졸들로 하여금 보호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제서야 대왕과 공주께서는 침전에 드시니 비로서 공주께서는 조용히 말문을 여신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皇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제가 본국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께서 저를 보고 말씀하시기를{우리가 어젯밤 꿈에 황천상제(皇 天上帝)를 뵈었는데 상제의말씀이 가락국의 임금 수로는 하늘에서 내려 보내어 왕위에 오르게 한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이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대들은 모름지기 공주를 보내어 짝을 짖도록 하라 하시고는 도로 하늘로 올라 가셨단다.  꿈에서 깬 뒤에도 상제의 말씀이 아직까지 귀에 생생하니 너는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거라}라고 하셨답니다. 이리하여 저는 배를 타고 증조(蒸棗*신선이 사는 곳에 있는 좋은 과일)를 갖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이 복숭아는 3천년만에 한번씩 열린다고 전함)를  찾아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이렇게 감히 용안을 뵙게 되었습니다] 대왕 또한 조용히 응답한다. [나는 나면서부터 자못 성스러워 공주가 멀리서 올것을 미리알고 있엇다오. 그래서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소. 이제 현숙산 공주가 스스로 오셨으니 이 몸은 매우 행복하오]

드디어 대왕과 공주는 혼인을 맺고 함께 두밤을 지낸후 또 하루낮을 지냈다. 그리고는 왕후가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며 15명의 뱃사공에게 각각 쌀 10석과 비단 30필을 주어 그 노고를 치하했다.  8월1일 아침의 일이었다. 대왕과 왕후는 그제서야 신하를 좌우에 거느리시고 수레를 타고 본궁으로 돌아와 두분이 힘을 합하여 정사(政事)를 펴게 됐다.

 


두왕자에게 허씨로 사성

 
가락기원 148년(서기189년) 3월 1일 왕후께서 붕어하시니 향년 157세였다. 온 나라 백성들은 그 어머니를 잃은 것처럼 슬퍼했으며 금관성(金官城) 서북 구지봉 (구旨峰) 동북쪽 언덕에 장사지내고 능의 이름을  후능 (后陵) 이라 하였다.

그리고 왕후 생전에 백성들을 사랑하던 그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왕후께서 처음 가락국으로 와서 상륙했던 그 나루의 마을을 주포촌 (主浦村)이라 부르기로 하고 왕후께서 비단치마를 벗어 산신령에게 예물로 바쳣던 그 산 언덕을 능현(綾峴),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 부르기로 하였다.

왕후를 따라온 신하 천부경 (泉府卿) 신보(申輔)와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은 두 딸을 낳고   30여년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고 그 나머지 노비들도 이 나라에 온지 7~8년이 되는데도 자녀를 낳지 못하였고 오직 고향을 그리는 슬픔을 안고 지내다 모두 죽으니 그들이 살던 빈관(賓館)은 텅 빈채 아무도 없엇다.

대왕께서는 왕후가 붕어하신뒤 매양 외로움을 달래며 슬퍼하시다가 왕후 가신지 10년후인 가락기원 158년(서기199년) 3월 23일에 붕어하시니 재왕위 121년 재태왕위 (在太王位) 38년 수(壽) 158년이셨다. 온 나라 사람들이 마치 부모를 여윈 듯, 왕후가 붕어했을때보다 더욱 비통해 했다. 대궐 동북방 평지에 높이가 한길,  둘레가 3백보 되는 빈궁을 축조하여 장사 지내고  수로왕 묘(首露王廟)라 하였다.

아드님 거등왕에서부터 9대손 양왕에 이르기까지 이 묘(廟)에 제향을 올렸는데 반드시 매년 정월 3일과 7일. 5월 5일. 8월 5일과 15일에 풍성하고 청결한 제물을 차려 제 올리는 일을 끊이지 않았다 (현재는 음력 3월 15일 과 9월 15일에 대제를 봉행한다) 고보왕 세계(古譜王世系)에  의하면 허왕후(許王后)깨서는 10남 2녀를 낳으셨는데 맏아드님은 제2대  임금이신 거등왕이며 차남은 거칠군(居漆君)으로서 3남과 같이 허씨(許氏)로 사성(賜姓) 되었고 나머지 7왕자는 모두  성불(成佛)하여  칠불사(七佛寺)에 병향(병享)되었다. 장녀 영안 공주(永安公主)는 태사(太師)배열문(裵烈文)에게 하가(下嫁)하였고 둘째 공주는 신라 석태자비가 되었다.



김해김씨*허 씨*인천이씨는 동본동근

김해김씨(金海金氏)와 허씨(許氏)와 인천이씨(仁川李氏)는 가락국 시조대왕을 시조로 하는 동일혈족이다. 즉 허씨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모계 (母系)의 성(姓)을 쫒고 있다는데서 타씨족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시조 허왕후(許王后 ) 께서는 왕자(王子) 열분을 낳으셨는데 시조대왕께서 태자는 왕통을 잇게하고 두 왕자는 이국에 출가하시어 늘 외로워하시는  시조왕비를 위로하는 뜻으로  모후(母后)의 성을 계승케 하였다.

가락국이 신라와 합친후 김해에 남아있던 허씨는 김해허씨가 되었으니 그 시조는 허염(許琰)이시다.또 하양으로 이주한 분은 하양허씨(河陽許氏)가 되고 그 시조는 호장 (戶長) 허강안(許康安)이시다. 또한 공암양천(孔岩陽川)으로 이주한 분들은 양천허씨가 되었으니 시조는  허선문(許宣文)이시다. 그러니까 모든 허씨들은 김해김씨로부터 갈라졌으며 가락의 왕손들이다.  선조들께서 가락국의   사적(社적)이 끊긴뒤 각기 사방으로 분거(分居) 하였다가 그곳에 정착하면서 그 고장을  관적(貫籍)으로 삼았던 것이다.

학계에서는 허씨의 모성 계승을 우리나라 고대의 부계사회(父系社會)와 모계사회(母系社會)와의 접합현상(接合現象)으로 받아 들이고 있다. 인천이씨는 바로 허씨에서 갈라진 분적종 (分籍宗)이며 시조는 고려 현종(현宗)때 상서좌복야(尙書左복야)를 역임하신 이허겸(李許謙)이시다. 공(公)의  선세(先世)에 허기(許奇) 란 분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셨다가 천자(天子)로부터 이씨로 사성(賜姓)받으셨으며 훗날 이허겸공께서 소송현 개국후(소城현開國候)에 봉해지면서 인천이씨로 관향을 갖게된 것이다.   소성이란 인천의 옛지명.



 (1)
陽川許氏 (양천허씨)

 ① 허씨의 유래
가락국 태조 7년(서기 48년) 에  16歲인 허 황옥을 비로 맞이 하여 슬하에 10남 2녀를 두었는데  장자 거등은 가락국의 왕위를 잇게 하고 황후 의 청에 따라서 2남과 3남에게 각각 허씨성을 주어 황후의 성을 잇게 하니 곧 차자 거칠부는 명월성의 성주가 되었고, 삼자는 명이다.

그 후에 후손들은 가락국이 폐망하자 각지로 흩어져 살기 시작했는데 문헌상에는 59개 본관이 나타나고 있으되 세인들은 대략 30여개의 본관이 확인되고 있다고 전하고 있으나, 이것은 단지 집성촌에 불과하고  본관으로서는 오직 양천, 김해, 태인, 그리고 하양 뿐이라는 양천허씨대종회의 의견이다.

거주지에 따라서 양천, 태인, 김해, 하양이 주류를 이루고, 경주, 광산, 김제, 김천, 남원, 대전, 밀양, 서산, 수원, 안동, 양구, 양주, 양평, 영천, 의성, 전주, 제주, 진주, 창녕, 청주, 한양, 해주, 시산, 남양, 대구, 함창 등 30개로 이들은 전국 약 7만여 가구에 30만명정도가 있다고 조사되고 있다.

② 시조와 본향
양천은 경기도에 있던 지역명칭으로 고구려시대에는 재차파의현, 신라 경덕왕때에는 공암현으로 불리다가 1310년에 양천현으로 개칭되어 1914년에 경기도 김포군으로 흡수되었다. 시조는 가락국 태조왕과 황후의 30세손으로 알려진 허선문이다.  그는 공암촌에서 살면서 농사에 힘써 많은 양곡을 비축하였는데 고려 태조왕건이 견훤을 정벌할 때에 군량미가 부족하여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군량을 공급해 주었다.  

이에 태조는 그 공으로 선문에게 공암을 식읍으로 하사하였는데 이때부터 본관을 양천으로 정하였다. 주요 대표 인물로는 선문의 손자 원은 내사사인, 지제고, 태자사 등을 지냈고, 증손 정은 예부상서를 거쳐 태자태보를, 후손 공은 수국사 겸 첨의중찬에 올랐다.  조선조에는 우의정 종, 좌의정 침, 좌의정 욱이 있고 숙종때의 우의정 목, 영의정 적은 상평통보를 주조하였다. 동지중추부사를 지내고 동인의 영수를 거친 초당 엽이 있고 그의 자녀 균과 난설헌이 있다.  또한, 선조의 명의 호성삼등공신이자 동의보감의 저자 준 등이 있다.

남한에만 대략 4만가구 20만명이 있고  주로 경기도와 평안북도를 중심으로 세게지가 형성되었다.


 (2)
金海許氏 (김해허씨)

시조 및 본향
시조 허염은 가락국 허화후의 35세손으로  고려때 삼중대광을 지내고 가락군에 봉해 졌다. 이후로 후손들은 김해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면서 가락군 인전파, 호은공 기파, 중승공 린판, 전적공 인부파. 증성군 구년파, 판서공 언룡파, 상서공 상파등 쿠게 7개파로 분파되어 있다.고려충렬왕때 지공거를 지낸 유전이 가락군에 봉해지고 첨의찬성사에 이어 재상이 되었으며, 옹은 전리판서를 지냈고,조선조에는 동지중추부사 백기, 목사 수겸등이 있으며, 한말의병장 위는 3백명의 의병으로 통감부를 격파하려다 실패하여 서대문감옥에서 옥사하였고,  이외 독립운동가로 겸, 빈, 병률, 형 등이 있다.

남한에 대략 40,00여가구에 20만명의 후손이  강원도 횡성,  홍천, 경남 의령, 합천, 대구 달서구, 경북 포항, 경기도 용원일원에서 집성을 이루며 살고 있다.


 (3)  泰仁許氏 (태인허씨) 

① 시조 및 본향
태인은 전북 정읍군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태산현과 인의현의 합명이다.  태산현은 백제의 대시산현을 신라 경덕왕이 태산으로 개칭되었으며, 인의현은 백제의 빈굴, 빈성이 신라시대에는 무성으로, 고려조에 와서 인의라 개칭되었으나 1411년에 합현되었다고 전한다.

시조 허사문은 가락국 태조왕의 비 허황후의 30세손으로, 고려 태조 왕건의 딸과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고, 시산군에 봉해졌다. 대표인물로는 후손 풍해도 관찰사 기천현령을 지낸 포가 있고, 병부시랑의 엄, 이부시랑을 지낸 벽, 중서문하평장사 경이 있으며 그의 아들 6형제 곧 사문은 낙안군수, 4자 사행은 감찰부 감찰, 6자 사제는 사평을 지냈다.

1985년 현재 남한에 약 8천명의 후손이 있고, 집성촌은 주로 전북과 전남에 많이 있다.


 (4)
河陽許氏 (하양허씨)

시조 및 본향
하양은 지금의 경북 경산시 북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고려초에 하주가 불리던 곳을 현종9년에 하양으로 바뀌었다가 조선 영조 18년에 화성현으로 개칭되고 고종32년에 하양군으로 바뀌었다. 그후 1914년에 경산군에 편입되면서 하양면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고려때 호부낭장을 역임한 허강안을 시조로 하며, 가락국 허황후의 33세손이다.   말년에 호장을 역임하고 하주에 정착함에 본관을 하주라 하더니 지명이 개칭됨에 따라 지금은 하양을 본관으로 삼고 있다.

대표인물로는 강안의 손자 작린이 고려조에 검교대장군을 지냈고, 신은 호부주사, 개성부윤 귀룡, 그의 야들 주는 고려때 지양주사를 거쳐 조선조에는 한성부윤과 경기도간찰사를 지냈으며, 주의 동생 조는 공양왕때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 세종때 우의정을 지냈고, 예문관대제학의 성, 형조판서와 세종실록을 편찬한 후, 중추원부사 척, 경주부윤을 역임한 계 등이 있다.

남한에 대략 5,000천여호에 20,000여명의 후손이 경산시, 전북 고창, 전북 진안, 경남 합천 등지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5)
仁川李氏 (인천이씨)

시조 및 본향 (득성의 유래)
가락국 태조왕과 허황후의 비의 후손으호서 신라 35대왕인 경덕왕조에 이르러 이찬 허기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안록산의 난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예로써 당 현종을 따라 촉나라로 가서 많은 어려움과 위험을 함께 하면서 황제 호위에 힘을 썼다.  다음해에 난이 평정되자 황제를 따라 환도를 하니 황제가 가상히 여겨 황제의 성인 이씨를 하사하였다. 4년만에 황제의 서신을 받들러 귀국을 하니 경덕왕이 공을 칭찬하며 소성백에 봉하였다.

이후 후손들은 이씨와 허씨로 복성을 사용하다가   태조왕 30세손에 이르러 형 허선문은 양천허씨를 잇고, 아우 허사문은 왕건의 딸과 혼인하여 즙과 도를 낳았는데, 열 즙은 역시 태인허씨를, 아우 도는 인천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도는 고려에서 상서좌복야 상주국 소성백으로 1500가구를 다스렸는데 소성은 인천의 옛이름이다.  이로써 인천이씨는 태인허씨와 분관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으니, 시조 문은  이름을 허겸으로 바꾸어 세계를 이루니, 이때가 서기 1024년이다.고려중엽에 왕실과 척연을 이루며 크게 세력을 떨쳤는데,  곧 이자연이다. 그의 세딸이 문종의 비로 간택이 되고, 이후 문하시중에 올랐다.

자연의 아들 호 역시 딸이 순종의 비가 되었고 그의 아들 자겸의 딸 또한 현종의 비가 되메  그 세력의 절정에 달하더니  현종의 아들 인종에게도 딸을 비로 간택되게 하고, 급기야는 난을 일으켰다가 세아들과 함께  귀향을 가게 되는데   이로서 그 권세는 종지부를 찍었다. 대표인물로는 고려조에 이정, 이예, 이오, 이자양, 이자덕 등이 평장사에 오르고, 이공수와 이장용은 문하시중을 역임하였다. 이세흥과 이극명은 대제학을, 이백선은 좌찬성, 이원굉은 문하평리를 지냈으며, 고려의 대표적 문인 이인로도 인천이씨를 대표하고 있다.   조선조에는 이조참판 이관, 예조판서 이거와 이문화, 호조판서 이효인, 형조판서 이효지, 좌승지 이승안, 대사간 이성동, 구한말 개화의 선구자로 이원모 등이 있다.

현재 대략 10만의 후손이 충북 영동, 경북 달성, 전남 장흥, 경남 의령, 경남 함안 등지에서 세거를 이루고 있다.


 
(6) 同祖異姓 (동조이성)

이 내용은 가락중앙종친회에서 동조로 공인된 사항은 아닙니다.

金陵金氏(금릉김씨)
가락국 양왕 휘 구형의 삼자 무득공을 시조로 하고 있다.
서기 562년에 고령의 대가야가 멸망하고, 진흥왕이 옛 가락국에 금관소경을 두어 무득공에게 시랑겸 총관을 제수하고 금릉군으로 봉했으므로 그의 아들 창현이 본관을 금릉으로 삼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후의 가계가 실전이 되고, 고려 고종때 금자광록대부 수사공 문하시랑평장사 서경유수 등을 지내고 태자태사에 올라 금릉군에 봉해진 김중구를 1세조로 삼고 있다.

대표인물로는 고려조에 보문각직제학 위, 태자첨사 효탁, 좌복야 관 등이 있고, 조선조에는 참의 택, 양주목사 광귀, 사복시정 규, 덕산현감 규, 이조참판 철성, 동지의금부사 상원등이 있다.

② 晉州金氏(진주김씨)
진주는 원래 백제의 거열성이었는데, 신라가 영토를 합병한 뒤로는 거열주라 불리었다가 경덕왕때에 와서 강주가 되었다. 이후 고려 성종때에 진주라 처음불리게 되다가 조선조에 와서 진야도호부, 진주목등으로 재편되어 서부 경남일대를 관한하는 지방관청의 중심이 되었다.

가락국 왕가의 후손으로 신라 태대각간 휘 유신공의 차자 원술공을 시조로 삼고 있는데, 원술공은 서기 672년 문무왕 12년에 당군과 말갈 연합군이 신라를 침락함에 출전하나 크게 폐하여 후퇴를 하지만, 왕명을 어기고 가훈을 더렵혔다는 이유로 아버지 휘 유신공에게 용서를 받지 못하자 태백산으로 들어갔다. 그 뒤, 서기 675년에 매초성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지만 역시 어머니 지소공주로부터 용서받지 못하여 이를 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세상을 비관하며 지주에서 여생을 마쳤다 하여 후손들이 진주를 본관으로 삼았다고 전한다.

대표 인물로는 손자 암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둔갑술에 능하였으며, 감찰 천우, 동지중추부사 장련, 첨정 덕수와 정묘호란때 안주방어전에서 전사한 양언 등이 있다.(손자 암은 우리 김해김씨 구보에서도 그 계보가 모호하여 등재와 삭제, 변경되는 예가 여러번 있으니  참고하라)

진주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이어오는 또다른 계통이 있다.  

③ 南陽金氏(남양김씨)
남양은 지금의 수원시와 화성시 일원을 포함하는 지역의 옛 지명으로 , 고구려때는 당성(唐城), 신라 경덕왕때는 당은(唐恩)으로, 고려초에는 다시 당성이 되었다가 1310년에 와서 남양으로 개칭되었다. 가락국 태조왕의 후예로 알려진 고려 의종때의 김적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나라에 변란이 있음을 직감하고 가족관 함께 남양 산곡에 이거하여 살았으나 그후의 세계는 실전되고, 조선개국에 공을 세워 남양백에 봉해진 김약해를 1세조로 하고 남양을 본관으로 하였다. 그의 아들 계는 성종때 성균관 진사가 되었으나, 무오사화때 연루되어 평안도 정주로 유배되었는데 후손들이 그 곳에 정착을 하여 세거를 이루고 있다.

대표 안물로 소위장군 장유, 전적 계정, 이조판서 수연, 어모장군 승업, 현감 덕연, 군자감정 철원, 중추부사 성곤 등이 있으며, 강원도와 평안북도에 후손들이 세거지를 이루며 살고 있다고 전한다.

④ 함창김씨
함창은 옛 고령가야의 중심지로  가락국 태조왕과 6알에서 나왔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 후의 세계는 실전이 되고 덕원군 김종제를 중시조로 삼고, 의산군 김세순과 ,검교소감어사  김균을을 파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루며 전국 대략 22,000여명의 후손이 있다고 전한다.

⑤ 고성김씨
가락국 태조왕과 함께 6개알에서 막내로  나와  시조를 김말로왕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의 세계가 실전이 되고, 고려 충렬왕때 문과에 급제하고 삼중대광 금자광록대부에 올라 추밀원지주사로 고령백에 봉해진 정렬공 윤화와 낙천군 수가 유명하며, 조선조에 와서는 양평공 미의 장자 빈길이 뛰어나다. 그의 아들 원량은 이조정랑을, 희량은 병조판서, 문량은 호조판서를 지냈고,  경현은 이시애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함길도 순무중군과 가선대부에 올랐다. 한말에 와서 봉섭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중오보통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고 전한다.

이밖에 수원김씨와 영동김씨도 연관이 있다고 하고 있으나 확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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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리를 찾아서 > 김해김씨의 유래


  김해김씨의 유래


족보(族譜)에 대하여

족보란 씨족사에 근본이 되는 것으로 중요 문헌이며, 또한 종족을 수합하기 위해서는 수보가 없어서는 안될 것이다. 가문을 장구히 계승되고 선조들의 유업을 후대에 전승하며 일족의 혈통사를 밝히는 것이 족보라 한다. 우리 선조들은 가문을 중시한 사상을 족보라는 보학에서 찾을 수 있다. 족보는 원래 중국 六朝시대에 시작되어 북송의 문장가인 三蘇(삼소) “소순”과 두아들(식,철)이 편찬한 “소보”가 표본으로 전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중엽이후에 김관의 의 왕대실록과 임경숙의 선원록이 효시이다. 현존하는 최고본족보는 조선조 명종 십칠년에 나온 문화유씨의 가정보라 한다. 이에 앞서 안동권씨의 성화보가 있었으나 서문만 전하고 세조때 양성지의 남원 양씨 족보와 성종때 김종직이 만든 선산김씨의 것등이 꼽히지만 전해지지 않는다. 이후 조선조의 반상계급시대에 들어서는 선조의 현달함을 자랑하기 위해서 씨족별로 다투어 족보를 만들어 왔다. 족보에 대한 집착은 일제의 핍박이나 서양문명의 도래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이어져 왔다. 족보란 자기의 과거와 현재를 밝혀주는 동시에 씨족 世系(세계) 및 행적을 모아둔 혈통사이며 또한 조상과 부모로 부터 천륜을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현실은 급변하여 부모형제간에 분리 거주하는 현상이며 또한 핵가족화가 보편화 되면서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름도 모르고 자라나는 신세대의 풍속을 우려하는 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같은 가족 붕괴 현상을 막고 뿌리의식을 심어주기 위해서 활용되는 것이 유일한 수단의 하나가 족보이다. 몇년전 “텔레비젼”에 흑인 家系(가계)를 그린 “뿌리”가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 일으킨 점을 상기하여 볼 때 뿌리는 모든 것에 있게 마련이다. 열매의 뿌리는 꽃이지만 꽃의 뿌리는 나무요, 나무는 싱싱한 뿌리를 흙속에 묻어두고 있다. 나의 고향은 가까이 부모요, 나아가조상이니 우리의 영원한 정신적인 안식처는 족보를 통해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족보는 씨족의 역사이나 곧 나의 역사요 조상의 혼이집약되어 나를 깨우쳐주는 寶庫(보고) 이라 하겠다. 족보는 한 씨족의 계보로서 부계를 중심으로 한 혈연관계를 알기쉽게 체계적으로 나타낸 책을 말한다. 이를테면 씨족사인 셈인데 조상을 숭상하고 종족의 돈목을 꾀하며 후손으로 하여금 원,근간에 서로 화목한 미풍을 조성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역사란 우리들이 살다간 시간과공간에 대한 기록이라 하는데 그렇다면 각 씨족의 족보를 취합하면 바로 우리의 역사가 되고 나아가 역사가 모아져 세계사가 아니겠는가. 조상을 알아야 예절을 아는 법인데 요즘의 젊은이들이 자기 조상을 모르고 또한 우리 역사를 모르면서 세계사를 얘기하는 것을 보면 안타가운일이다. 비판없이 서구문물만 받아들여 그것이 최고인양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떠받드는 것이 배운자들의 몫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가정교육이 문제라는 지적도 많지만 이것 또한 물질만능주의가 낳은 병패라고 본다.

늦은감이 없지않으나 지금부터라도 우리것을 찾고 이어가자는 기성세대의 자성이 절실히 요구된다 하겠다.



가락 김해김씨(金海金氏)

김해(金海)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하는 고장으로 고대국가(古代國家)인 6가야(六伽倻) 중 금관가야(金官伽倻)의 중심지였으나 서기 532년(신라 법흥왕 19) 신라(新羅)에 병합되어 금관군(金官郡) 또는 금관소경(金官小京)이라 불리우다가 680년(문무왕 20)에 김해(金海)로 개칭하여 소경(小京)을 두었다.

일찍이 가락국(駕洛國) 역사와 함께 문호(門戶)를 개방한 김해 김씨(金海金氏)는 신라 김씨(新羅金氏)의 알지계(閼智系)와 함께 우리나라 김씨(金氏)의 양대산맥(兩大山脈)을 이루어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번성하여 왔다.

김해 김씨(金海金氏)의 연원(淵源)은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가락 국기(駕洛國記)]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서기 42년(중국 후한 건무 18) 3월 가락국(駕洛國)의 아홉 촌장이 구지봉(龜旨峰) 산정에 모여 나라를 통솔할 군장(君長)을 얻기 위해 하늘을 향해 의식(儀式)을 올리자 하늘에서 한줄기 붉은 빛이 내려와 함께 달려가 보니 금합(金盒)에 여섯 개의 알(卵)이 담겨 있었다. 이튿날 알 속에서 여섯 동자(童子)가 나왔는데 그중 맨 먼저 나온 동자를 수로(首露)라고 이름짓고 금합(金盒)에서 태어났다하여 성(姓)을 김씨(金氏)로 하니 그가 바로 김해 김씨(金海金氏)의 시조(始祖)인 김수로왕(金首露王)이다.

군왕(君王)이 된 수로왕(首露王)은 나라이름을 대가락(大駕洛)으로 정하고 남천축(南天竺 : 고대 인도의 행정지역)에서 바다를 건너온 허(許) 여인을 왕비(王妃)로 맞아 10명의 왕자(王子)와 2명의 공주(公主)를 두었다.

그후 10대(代) 구형왕(仇衡王)이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항복하고 상등(上等)의 작위(爵位)와 가락(駕洛)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았으며, 그의 아들 무력(武力)이 각간(角干)을 역임했다. 구형왕의 증손(曾孫) 유신(庾信)은 신라 무열왕(武烈王)과 함께 삼국통일(三國統一)의 대업(大業)을 달성(達成)한 명장(名將)으로 무열왕의 딸 지소 부인(智炤夫人)과 혼인하여 김해 김씨(金海金氏)의 세계(世系)를 이었다.

김해 김씨(金海金氏)는 중시조(中始祖) 유신(庾信) 의 후대(後代)에서 가세(家勢)가 크게 번창해짐에 따라 148여개 파(派)로 분파(分派)되었으며, 그 중에서 경파(京派)와 사군파(四君派)·삼현파(三賢派)·문경공파(文敬公派)의 후손들이 가장 많다.

각 파별(派別)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경파(京派)의 파조(派祖)인 목경(牧卿)이 고려 충정왕(忠定王) 때 조 적의 난(亂)을 평정(平定)하는데 공(功)을 세워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졌으며 당시 혼란한 국정을 개탄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조년(李兆年)과 함께 누차 왕에게 상소 했으나 듣지 않자 속리산(俗離山)으로 들어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여생을 마쳤다.

목경(牧卿)의 맏아들 보(普)는 공민왕(恭愍王)이 세자(世子)로 연행(燕行 :국가의 사절로서 중국의 북경에 감)할 때 시종(侍從)한 공(功)으로 일등공신(一等功臣)의 호(號)를 받았고, 보(普)의 6세손 영견(永堅 : 동지중추부사)·영서(永瑞 : 현감)·영정(永貞 : 성종 때 대사헌)·영순(永純 : 한성 판관) 4형제가 빼어났으며, 숙종(肅宗) 때 명신(名臣) 우항(宇杭)은 영정(永貞)의 후손으로 1713년(숙종 39) 우의정 (右議政)에 올랐다.

사군파(四君派)에서는 파조(派祖)인 익경(益卿)의 손자(孫子) 진문(振門)이 고려말에 예의판서(禮儀判書) 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올랐으나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하자 관직을 버리고 이 색(李 穡)·박자검(朴自儉) 등과 함게 은거(隱居)하여 절의(節義)를 지켰으며, 그의 둘째 아들 추(錘)는 도총관(都摠管)을, 넷째 아들 석(錫)은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막내 조는 세종(世宗) 때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을 거쳐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올랐으며,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할 때 장영실(蔣英實)과 함께 간의대(簡儀臺)·자격루(自擊漏)·혼천의(渾天儀) 등을 만든 것으로 전한다.

특히 그는 벼슬이 옮겨질 때마다 몽은제(蒙恩祭)를 올리는 충신(忠臣)으로서도 이름이 났고, 세종(世宗)이 평소의 소원을 묻자 "백년 동안 날마다 어탑(御榻 : 임금이 앉는 제구)을 모시고 금규화(金葵化) 앞에 진퇴를 엎드려 묻기를 원합니다" 라고 대답한 것으로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전한다. 한편 진문(振門)의 6세손 극희(克禧)가 명사수로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막하에서 전공을 세우고 한산도 싸움에서 전사했으며, 그의 조카 완(完 : 학천군 극조의 아들)은 역전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임진왜란 때 남원대첩(南原大捷)에 공(功)을 세웠던 그는 1624년(인조 2) 이 괄(李 适)의 난을 평정(平定)할 때도 창성 방어사(昌城防禦使)로 길마재 결전에서 공을 세우고 진무삼등공신(振武三等功臣)에 올라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우 우(宇)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벽동(碧潼)의 성(城)을 사수했던 명장(名將)으로 름이 높았다.

우(宇)의 아들 여준(汝峻) 은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昭顯世子 : 인조의 맏아들 인열왕후 한씨의 소생)와 인평대군(璘坪大君)을 호종한 18장사(壯士)의 한 사람으로 심양(瀋陽)에 갔을 때 옥하관(玉河關)에서 세자(世子)를 소리내어 울렸다는 <월명비안(月明飛雁)>의 노래를 읊어 더욱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용력에 힘을 뽐내며 목숨을 건 결투를 신청해 온 청(淸)나라 장수(將守) 우거(禹巨) 의 코를 문질러 이김으로써 병자호란의 굴욕과 인질로 잡혀가는 세자를 호종하는 비애 등 백성들의 원한을 풀었다고 한다. 그후 세자가 돌아와 즉위한 다음에도 이 슬픈 기쁨과 옥하관의 달밤 일을 못잊어 과거의 시제(時題)에 <월명비안(月明飛雁)>의 노래를 자주 출제하였다 한다.  

송상현(宋象賢)·유극량(劉克良)과 더불어 <삼충절(三忠節)>로 일컬어진 동광 은 회양 부사(淮陽府使)로 재직시 임진왜란 일어나 성(城)이 함락되자 좌우를 피난시키고 성(城)의 정문(正門) 앞에 조복단장한 채 관인을 쥐고 단좌하여 적에게 저항하다가 참살당하여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삼현파(三賢派 : 판도판서공파)의 일세조(一世祖)인 관(管)은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학교(學校)를 건설하여 유학(儒學)을 진흥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功)을 세웠으며, 그의 현손(玄孫) 극일(克一)은 효행(孝行)으로 이름을 떨쳤다.  극일(克一)의 아들 맹(孟)은 세종(世宗) 때 문과(文科)에 올라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밤에 용마(龍馬)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준손(駿孫)·기손(驥孫)·일손(馹孫)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들 3형제가 모두 빼어나서 <김씨삼주(金氏三珠)>로 일컬어졌다.

1486년(중종 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일손(馹孫)은 일찍이 당대의 거유(巨儒)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전라 감사(全羅監司)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사초(史草)에 썼다가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연산군(燕山君)이 등극하여 [성종실록(成宗實錄)] 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李克墩)이 당상관(堂上官)으로 참여하여 사초(史草)를 살피게 되니 일손의 스승인 김종직 (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意帝文 :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글)을 실은 것이 발견되어, 이극돈이 노사신(盧思愼)·윤필상(尹弼商)·한치형(韓致亨) 등과 함께 연산군에게 알려 무오사화가 일어나 일손은 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 이 목(李 穆) 등과 함께 참수(斬首) 당하였고, 김종직(金宗直)은 부관참시(剖棺斬屍 : 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일)되었다.

일손(馹孫)의 강직한 기개와 재능은 후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중종조(中宗朝) 영의정(領議政) 남 곤(南 袞)은 말하기를 "세상에 다시 탁영(濯纓 : 김일손의 호)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까. 그의 문장(文章)을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江河)와 같고 나는 개천에 지나지 못하다"라고 일손의 짧은 생애를 애석하게 여겼다.

삼현(三賢)의 한 사람인 대유(大有)는 일손(馹孫)의 조카이며 준손(駿孫)의 아들이다.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숙부(叔父) 일손이 참수당하자 부자(父子)가 함께 호남(湖南)에 유배되었다가 중종(中宗) 때 풀려나와 평생을 강개한 지절(志節)로 살았으며, 3개월 간의 칠원 현감(漆原縣監)을 마지막 벼슬로 사직하고 청도(淸道)의 운문산(雲門山) 속 삼족당(三足堂)에서 73세로 일생(一生)을 마쳤다.

일손(馹孫)의 증손(曾孫) 언유(彦諭)는 고양(高陽)에 살면서 지극한 효행(孝行)으로 명망이 높았고, 시(詩)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松雪體)에 능하여 공사(公私)의 비(碑)와 병풍·족자의 글씨를 많이 썼다. 언유(彦諭)의 아들 현성(玄成)은 광해군(光海君) 때 폐모론(廢母論)에 불참하여 면직되자 청빈하게 여생을 마쳤으며, 시·서·화에 모두 능했다.
그 밖의 인물(人物)로는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공(功)을 세운 경서(景瑞)와 [운서(韻書)]를 깊이 연구하여 중국어(中國語)에 능통했던 덕승(德承),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예직(禮直), 조선 풍속화의 조종(祖宗) 홍도(弘道)가 유명했고, 충효정려(忠孝旌閭)를 사액(賜額)받은 진희(晋熙)와 <해동가요(海東歌謠)>를 남기고 [청구영언(靑丘永言)]을 편찬한 천택(天澤) 등이 명문거족(名門巨族)의 김해 김씨(金海金氏)를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김해 김씨(金海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892,328가구, 3,767,06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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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리를 찾아서

 0.  가락김해김씨의 유래

 1.  영정 및 유적

 2.  전체직계도

 3.  각파 항열표

 4.  각파 및 파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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